마스크 없는 평범한 일상이 간절히 그리웠던 한해였다. 잠시나마 숨을 쉬게 했던 위드 코로나가 시행된 지 한 달만에 거리두기로 전환되었고, 우리는 속절없이 청명한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겨울비가 내린 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다. 차가워진 공기가 폐부 깊숙이 깃든 어느 날, 무기력함을 떨쳐버리듯 이젠 고물이 되어버린 낡은 필름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표정을 알 수가 없다.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롱패딩을 입은 채 앞만 보고 무심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안동 시내에서 불과 500m 떨어진 성진골에도 겨울 바람이 불었고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흰색 마스크가 있었다.
영남산으로 오르는 기슭을 따라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낡고 빛바랜 지붕 아래로 집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담장이 나지막한 집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가 반쯤 굽은 할머니 한분이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오며 이웃에게 말을 건넨다.
“보소. 은이 아배요, 주사 맞았니껴. 또 맞아야 한다그러대요.”
“나는 어제 맞았니더. 얼른 병원 가보소. 빨리 맞아야 애들이 와도 걱정이 덜되니더.”
“그러지요.”
집과 집의 경계가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벽이 없는 성진골의 풍경이었다. 마음이 훈훈해졌다. 신세동 벽화마을에서 성진골 벽화마을로 고쳐부르게 된 것도 신세동이란 이름이 주는 신세 지는 느낌이 싫어 성진골 벽화마을 혹은 그림촌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하더니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성진골을 도심 속 달동네로 부르지만 요즘 달동네는 달과 가까운 동네라서 꿈을 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가파른 계단과 높은 언덕에 위치한 성진골은 달에 살던 토끼가 내려와 마을 속 이곳저곳에 숨어들어 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살찐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양지 바른 바닥에 철퍼덕 누워 있는 성진골. 그냥 근심이 사라졌다.
이제껏 무엇에 조바심을 냈고 무엇이 걱정되어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지.
마을을 지키는 봉희할머니와 인심좋게 생긴 토박이 아저씨의 얼굴이 벽화에서 웃는다. 기타치는 청년과 그를 바라보는 여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피리부는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성진골에 작은 음악회가 열린 듯 하다.
거미줄에 매달린 스파이더맨은 개구쟁이처럼 거꾸로 매달려 인사를 한다.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 앨리스처럼 성진골에 가면 마음이 넉넉해지는 마법에 걸린다. 어느 것 하나 급한 것이 없다. 느긋하고 여유롭다.
‘사랑하길’, ‘니가 오길’이 적힌 예쁜 글을 따라가면 그 길 제일 높은 곳에서 노을이 아름다운 전망 좋은 카페 ‘다시, 여기서’를 만난다.
무작정 안동에 여행왔다가 이곳 노을에 반해서 정착해 버렸다는 카페 주인 뚜비 아저씨는 이곳을 ‘작은 영화관’라고 자랑한다. 매일 다르게 상영된다는 안동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다시 여기에 서 있기를 기대한다.
안동 도심 너머로 지는 석양은 유난히 강렬한 붉은 빛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석양의 뒷 모습은 늘 아름답다. 소년이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는 조각상처럼 한순간도 이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
성진골 벽화마을은 가식이 없고 인위적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미로를 헤매 듯 공간을 헤쳐 나가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있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요? 마스크로 표정을 가린 어려운 시기에 살다보면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팍팍하다.
그러나 성진골 사람들은 서로를 믿는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오순도순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갑자기 찾아오는 누군가를 따듯하게 맞을 준비를 한다. 석양이 붉어진 하늘을 보며 그들은 말한다.
“모두 다 사랑하길, 그리고 노을이 지기 전에 니가 오길”
겨울 그 가운데서도 낡은 필름 카메라가 당당히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는 성진골 벽화마을이었다.
글. 신현랑(수필가). 사진. 이대율(안동인터넷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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