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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오후 4:45:40 입력 뉴스 > 안동뉴스

[구술생애사]일직면 광연리 시인,권영숙
'혹독한 삶의 시련, 글로 위로하다'
[안동시공동기획연재]2019안동예천 근대기행(5)



- 70에 첫 시집을 낸 할머니 시인

- 파란만장 그 세월 '참 재밌다 그지'

- 거친 풍파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난 삶

 

▲ 권영숙(75) 할머니 ⓒ정형민.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네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에 사는 권영숙 할머니입니다. 칠십 넘어 첫 시집을 낸 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입니다. 거친 풍파를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난, 사랑에 용감했고 시에 몰두했던 권영숙 할머니의 삶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 편집자

 

▲ 일직면 광연리 ⓒ정형민
 

 

여든을 바라보는 내가

이제 첫발을 딛습니다.

60억 인구 중의 미미한 존재지만

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의 내부에 참답게 관용을 못한 채

평생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쓰든 달든 나만의 길,

아름다운 동화처럼

그저 그립습니다.

 

2018년 봄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서문

 

 

일직면 광연리 사는 권영숙 할머니. 70대 할머니가 되어서 첫 시집을 내신 분이라는 얘기를 듣고, 올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뇌는 스스로 권영숙 할머니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되어서 뒤늦게 시를 배우고, 시집을 내셨나 보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하면서 어떤 호칭을 사용할까 참 고민이 많았다. 권영숙 시인, 시인 할머니, 할머니, 어르신. 낯선 어른을 뵙는 일은 참 어렵다. 다행히 첫 통화에서 낯선 만남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는데, 통화 말미에 시인께서 해주신 말씀이 따사로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권영숙 시인선생님이세요?"

 

", 글니더."

 

사투리를 구사하는 투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사는 봉화 산골 동네의 옆집 할머니랑 얘기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는 오지 다큐를 찍는 정형민 감독이라고 합니더. 어르신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드렸습니더. 저도 11년 전에 봉화로 귀촌해서, 어머니랑 함께 살고 있습니더."

 

"아이고 효자시네. 어머니까지 모시고……."

 

"아닙니더. 결혼도 못 하고 아직 어머니 옆에 있는 불효잡니더."

 

"그런 게 중요한가?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그게 최고지."

 

사실 할머니의 답변에 많이 놀랐다. 주변에 계신 어른들은 한결같이 "빨리 결혼해서 어서 아기를 낳아야지"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보통 할머니들과 많이 다름!'

 

갑자기 내 마음은 권영숙 할머니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 시작했고, 할머니한테서 삶에 대한 소중한 지혜들를 얻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만남은 안동향교회관에서 이루어졌다.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소학을 배우러 안동향교회관에 나오신다고 하셨다. 솔직히 첫 모습부터 남다르셨다. 체구는 작았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작은 배낭을 멘 모습에서 활기와 정열 같은 게 느껴졌다. 할머니께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자고 하셔서, 일직면 읍내에 들렀다. 할머니는 자꾸 불고기를 먹자고 하셨는데, 한눈에 보아도 손님 대접을 하시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몰래 밥값을 계산해도 야단을 맞을 것 같아서 머리를 굴렸다.

 

"어머니, 불고기가 드시고 싶습니꺼?"

 

귀한 손님이 이렇게, 아니 "오셨는데, 그래도 맛있는 걸 대접해야지요."

 

"그럼 저는 간단히 먹으면 좋겠습니더. 제가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고기를 먹지 싶습니더."

 

"그러니꺼? 그러면 정식 먹을까요?"

 

", 정식이 딱 좋겠습니더."

 

시인 할머니를 만나기 전부터 아주 궁금했던 게 있었다. 일직면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권정생 선생님이 떠올랐다. 일직면에 권정생 선생님도 일직면에 사셨으니, 권영숙 할머니와 어떤 인연이 있지는 않을까?

 

▲ 일직 권영숙 할머니 댁 ⓒ정형민

▲ 일직 권영숙 할머니 댁 ⓒ정형민

 

늘 동경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던 권정생 선생

 

우리 집안 어른이지요. 우리 마을에 권씨가 50명쯤 살아요. 권정생 할배가 일직면 조탑리에 사셨잖아요. 근데 내가 선생님 살아생전에는 우리 집안인 줄 몰랐어. 제일 가까운 집안인데 몰랐다니까! 돌아가시고 나서 뒤늦게 알았지. 내가 그것도 모르고정생이 할배 부친은 옛날에 우리 집에 와서 더러 밥도 자셨는데, 굉장히 못살았어. 그때 우리 집은 밥은 먹고 살았기 때문에 그 할배가 더러 오셨어.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간이 털썩 내려앉더라꼬. 우리 집안 어른인 줄 몰랐을 때도 늘 뵙고 싶었지. ‘몽실 언니가 테레비에 나오고 그라니까, 우리 일직에 저런 유명한 분이 계시는데 언젠가는 한번 그 할배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남편 없이 사니까 내 삶이 얼마나 힘들어. 막노동판에 가서 일 마치면 해가 빠지제. 또 그 할배 있는 마을이랑 우리 동네는 왕래하기가 참 힘들어. 조탑이 옛날에 엄청 깡촌이라서 차가 잘 안 갔다니까. 그래가 못갔다카이. 그래서 내 마음이 안 좋아.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 할배가 젊었을 때부터 몸이 아팠잖아. 폐 질환을 앓다가 또 복막이랑 방광까지 그 세월을그래서 내가 저 할배는 저렇게 아픈 몸으로도 글을 쓰는데 나는 도대체 뭐 하는기고 싶어서 늘 마음속으로 동경했지. 그런데 우리 모친도 정생이 할배 돌아가신 그해 5월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장례 때도 못 가봤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거든.

 

▲ 권영숙 할머니의 방. 머리맡 서랍장에 권정생 선생 사진과 모친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정형민
 

어느 날 일직면 공공근로일을 하게 되었는데, 정생이 할배 집 일을 시키더라고. 한 달 동안 했어. 조탑동에 가서 환경미화하고, 방문객들 맞을 준비하고, 꽃밭 만들고, 코스모스 심고, 메밀 갈고 홍초 심고... 하여튼 멋지게 만드는 거야. 그때 우리가 벽화도 그리고 일을 했거든. 그렇게 갈 수 있는데, 내가 왜 한 번도 할배한테 못 찾아갔는가 싶더라고. 살아 계실 때 할배를 봤으면, 내 인생이 더 빨리 달라졌을지도 몰라. 그때는 시를 쓸 생각은 안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주절주절 글을 계속 쓰려고 했었거든. 쓰려고 하는데, 글은 잘 안 되고... (웃음) 막 그러면서 살았지. 정생이 할배는 정신력이 놀라워. 책을 얼마나 많이 쓰셨는지, 나중에 도서관에 가니까 할배 책이 그만치 많은 걸 알았지. 동화 쓰기가 진짜 힘들잖아요. 그 불편한 몸으로도 아이들 생각하면서 그렇게 많은 책을 쓰신 걸 보면, 진짜 역사적인 인물이지. 정작 당신은 홀로 그렇게 아프고 힘들게 사시고, 남을 위해 잘 살게 해주고 떠나셨잖아요.

 

▲ 권정생 동화나라에서 ⓒ정형민
 

어디까지 왔나

 

 

세월에 배 띄워오니 순풍만 아니더라

허허벌판에

모가 깨진 마음이 웃습니다

 

놀란 꿩처럼 휘둥그래 뜬 생각이

아직은 살아 있다는 긍정을 가져봅니다

 

한순간의 일도 낮잡아 잊어버리는

잎 진 꽃입니다

접혀진 투박한 나이테는

옹졸하게 시샘까지 합니다

 

희망을 가져보아라

붙잡아보고 싶어도 손 새에 빠지는

모래알 같습니다

 

냉골에 들기 전까지

뇌세포의 포말을 또렷이 하기 위하여

신의 로고스를 찾아도 봅니다

 

나는

내가 뭣을 해야 되는지도

어벙벙해지며

해목은 어머니 사진만 자꾸 꺼내봅니다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부잣집 딸인 어머니, 농림학교 수재였던 아부지

 

우리 엄마는 임하면에서 부자집 딸이었어요. 논만 4백 마지기에 집 대지가 6백 평이었어. 어머니가 한 살 연상이셨어요. 외할아부지가 엄청 부자였지만, 여자가 공부하면 바람난다고 어머니를 학교에 안 보내셨다니까. 그런데 아부지가 농림학교를 나왔는데 소문난 수재였거든. 그래서 아부지가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아부지한테 엄마를 시집을 보낸 기라. 우리 집도 대가족이었는데, 위로 오빠가 있고, 내가 둘째 그리고 남동생, 그 밑으로 쭈루룩 딸만 넷 그렇게 7남매였지요. 내가 19451224일에 태어났는데, 그때는 다 출생신고를 늦게 했잖아. 하지만 아부지가 면사무소에 근무하셔서, 내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출생신고를 했어요.

 

어릴 때 외갓집에 가면 하인들도 있고, 큰 괘종시계가 당당 울리고, 재봉틀도 있고 집안에 온갖 화초가 피어 있고 선인장까지 있었으니까, 진짜 부자지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아부지한테 시집와서 고생이란 걸 처음 해본 거지. 엄마는 가난하게 사실 때에도 몸에 한 줌 흐트러짐이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에 동백기름 바르고. 사람들 눈에 교만하게 보일 정도였어. 우리 집도 부자였는데, 아홉 살 때까지 머슴한테 업혀 댕겼어. 그때 집에 목화밭이 있었는데, 목화 수확할 때면 할매가 꼭 날 데리고 갔지. 그럼 나는 밭고랑에 혼자 놀다가 목화 가시에 긁혀 피가 나면 엉엉 울었지.

 

 

나의 아픔은

 

 

나의 아픔은 사랑

덤빌 줄도 모르고

구할 줄도 모르고

어리석게

오랜 기다림으로

쫓아오기만 기다리는 바보

그대를 꿈꾸며

나를 노래해 달라

눈물 흘리며

바보처럼

어리석은 행복을 기도하며

하염없는 기다림 속에

그대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눈물 뿌린 시간을 보내는

바보로 남으리라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 일직고등공민학교 시절. 왼쪽이 권영숙 할머니
 

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낯선 남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6.25가 터지고, 우리도 소달구지를 타고 의성까지 피난을 갔어. 의성에서 소도 내버리고 그때부터 청도를 지나서 밀양까지 걸어갔지요. 그때 내가 6살이니까, 발이 엄청나게 부어올랐어. 그러다가 밀양에서 오빠까지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할매랑 엄마가 엄청 울었제. 아부지도 장남이라고 얼마나 예뻐했겠노. 다행히 오빠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니까 자기 이름은 쓸 줄 알잖아요. 그래서 아부지 이름을 부르고 다니니까, 누가 데리고 왔더라고. 그런데 오빠를 찾자마자 아부지가 붙들려 가버렸어. 헌병들이 막 호루라기를 불면서 검문을 하는데, 우리 아부지가 외동이니까 집안을 지켜야 했거든. 그래서 친척 할배들이 우리 아부지는 붙잡혀 가면 안 된다고 엄마 치마 밑에 숨으라고 했지. 그때 엄마가 여동생을 임신해서 배가 산처럼 불룩했는데, 거기 숨으면 우쨌겠노? (웃음) 하여튼 아부지는 막 화를 내시더라고. 사나이 대장부가 군대에 가야지, 여자 치마 밑에 왜 숨노 하면서……. 그래서 당당히 붙잡혀 가버렸어. 군대를 갔다가 왔는데 전쟁이 나서 또 끌려가신 거야. 그래서 아부지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엄마는 나를 오빠 따라 학교에 일찍 넣었지.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에 갔다 오니까 얼굴이 누런 남자가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 속으로 얄궂어 보이는 저 남자가 누굴까 생각했지, 내가 아부지를 못 알아봤어. 그때 간디스토마에 걸려서 얼굴이 누렇게 돼서 돌아왔더라고. 엄마가 개를 얼마나 잡았는지 몰라. 그래서 겨우겨우 살아나셨어. 아부지가 간간이 군대 끌려가서 겪었던 얘기를 해주셨어. 총살당할 뻔했다가 살게 됐다고. 전투가 한창 벌어졌는데, 산에서 굴러 떨어져서 뒤에 혼자만 남게 되셨대. 다행히 산을 헤매다가 부대를 찾았는데, 탈영병이라고 총부리를 딱 겨누더라네. ‘! 이제 죽었구나생각하셨는데, 마침 거기 책임자가 농림학교 후배였는기라. 그래서 그 후배 덕분에 총살을 면했지. 아부지는 팔에 총 맞은 자국도 있었어. 전투하다가 총알이 팔을 관통했거든.

 

▲ 일직고등공민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 가는 길

 

전쟁이 끝나고 아부지는 다시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셨는데, 아부지 간호한다고 집안 살림이 많이 기울었지. 그래도 참 멋쟁이셨어. 일직면장도 오래 하시고. 그때는 학교 마치면 면사무소에 놀러 가서, 인쇄하는 롤러를 가지고 장난도 많이 쳤지. 아부지가 면장 선거 나갈 때 논밭까지 다 팔아버렸어. 그래서 내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어요. 그때 중학교 입학금이 3,300원인가 했는데, 입학금이 없어서 안동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은 했는데 못 갔어. 집안 살림도 어려웠지만, 오빠가 사범대학에도 가야 되고, 밑에 남동생도 있으니까. 그래서 놀다가 동네에 있는 일직고등공민학교에 조금 다녔어. 인가가 없는 학교였는데, 그때만 해도 학교에 늦게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보다 5살 많은 학생도 있었어요.

 

▲ 일기장을 꺼내본다 ⓒ정형민
 

 

노을

 

 

누가 사랑을 하다

서쪽 하늘에 걸어둔 건가

다 못한 정

애타는 불꽃인가

그래서 그리움이 목말라

그토록 발갛게 타나

 

눈물 젖은 너

속 오빈 마지막 적선에

갈대밭 함께 불탄다

피라미 떼만 반짝반짝

노을 춤추는

여울살 물 구르는 소린

백사장

 

붉고 고운 이마에

어둡살이 앉으려니

물새야

너는 또 왜 달떠 우는가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
 

부모님의 결혼 반대, 그리고 삭발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갔어. 옛날에 오빠나 언니한테 책을 물려받잖아요. 그래서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어. 그때는 학교도 멀고, 공부하기 싫어서 맨날 울었어. 학교까지 10리 길이었거든. 왕복 20. 학교 안 가고 철둑에서 맨날 놀아뿌러. 그럼 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막 쫓아 와. 그럼 울면서 도망가고, 할매 치마폭에 숨고 그랬지. 난 어릴 때도 내내 혼자 놀았어. 그때는 같은 성 아니면 같이 안 놀아줘. 같은 집안사람 아니면 안 놀아준다니까. 원래 고향 마을(일직면 원리)에는 권씨들이 없었어.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여기 광연리로 이사를 했지. 여기는 권씨 집성촌이거든. 그런데 학교가 더 멀어졌어. 왕복 30리나 됐지. 지금 사는 이 집을 아부지가 동네 어른들하고 직접 지었어. 큰 기와집을 뜯어서 소달구지에 싣고 옮겼지. 작은 짐들은 지게로 옮기고. 옛날에는 원래 살던 집을 뜯어서 새집을 짓곤 했다꼬.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연리로 이사하고 나서부터 우리 주인(남편)을 봤어요. 나보다 두 살 위 동네 오빠였는데, 같은 학교 한 해 선배였지요. 우리 오빠랑 같은 학년이었는데, 오빠가 공부를 잘했거든. 그래서 공부 못하는 우리 아저씨를 상대도 안 하더라고. 그래도 나는 우리 아저씨가 참 좋았어. 사람이 참 착했거든. 그때 우리 신랑 등에 타고 개울도 많이 건너다녔어. 맨날 물 건널 때 업어주곤 했어. 그러다가 우리 주인이 가슴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나 봐. 그런데 나는 아예 아닌기라. 우리 집하고 그 집하고 너무 차이가 나니까. 그런데 아저씨가 우물가에 쪽지를 갖다 놓으면 내가 잽싸게 챙겼지. 다른 사람이 보면 절단날 일이제. 어쨌든 어릴 때부터 만났으니까 나도 결혼을 해야 하는갑다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정말 반대하는기라. 그래서 우리 아저씨한테 시집 안 보내주면 죽어버린다꼬 내가 내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렸어. 그러면 다른 데 중매를 못 설 테니까. (웃음) 그때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때 나랑 선을 봤던 남자가 대학 교수가 됐는데, 지금은 퇴직했을끼라. 그 사람이 우리 집안 동생한테 묻더래. 나랑 선봤던 그 아가씨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람 지금 다마내기(양파) 까면서 하루 3만 원 번다캐라 그랬지. 우리 아저씨가 나한테 혈서를 써서 마음을 고백할 정도로 날 열렬히 사랑했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고생을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많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번도 안 싸웠어. 우리 아저씨가 정말 착하고 순딩이었거든. 가끔 내가 화를 내도 늘 나를 안아주었어.

 

▲ 할머니를 열렬히 사모했던 남편 김동혁
▲ 어머니(배성화)와 함께
 

 

! 사랑이여

 

 

피맺힌 사랑이여

당신의 마음이 가버렸나

내 마음이 가버렸나

 

저 멀리

시냇가

아지랑이 아롱거리며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당신의 사랑은

나의 귓전에 와 닿았지

너를 사랑했노라고

무척 사랑했었다고

 

허지만

지금은

찢기우는 눈물이

마음을 찢는

아픈 사랑을 낳았지

 

! 맑았던 그 사랑이여!

어릴 때 꾸밈없었던 그 사랑이여

 

(중략)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 국제염직에 다니던 시절의 남편(앞줄 왼쪽).
 

문래동 판자촌 생활

 

결혼반지도 못 주고받았어. 내가 스물넷이고, 신랑이 스물다섯이었지. 그때 너무 가난하니까, 반지 값으로 돼지 새끼를 한 마리 사서 그걸 살림 밑천으로 시작했지. 그렇게 그래저래 살다가, 신랑이 국제염직에 다녀서 서울로 올라갔어요. 영등포 문래동이랬어. 그런데 세상에나 올라가 보니까 여기 거지는 거지도 아니야.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완전히 진창이더라고. 영등포 그 둑에서 살아가는 삶이. 그런 데서 몇 년을 살았다니까, 맨날 눈물 찔찔 흘리면서. 거기 강서구 화곡동이 그때는 전부 다 논이었어, 목동까지. 강둑에 나가서 새우도 잡으러 다녔지. 쪼깨난 새우가 억수로 많았어. 그리 살아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멸치 장사도 하고 떡 장사도 하다가 그때부터 내가 담배에 손을 댔어. 내가 내 삶을 못 받아드리겠더라고. 너무 형편없이 사니까. 얼마나 못살았는지 설명하기도 힘들어. 엄청 작은방에 연탄불 피워서 겨울을 나고, 수돗물도 사람들이 물통 들고 가서 10, 20원 주고 사서 먹었다니까. 주인집에서 수돗물까지 팔아먹고 살아. 서울에 있을 때 첫째를 낳았는데, 겨우 돌 지난 애를 방에 남겨두고 문을 잠가 놓고 일하러 다녔거든. 옛날에는 여의도에 공군부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면서 그렇게 울고불고 살았어. 다다미방이 추우니까 애(장남)는 맨날 설사하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안동으로 내려와 버렸지. 우리 아저씨한테 나는 다시는 서울 안 간다고 그랬어. 나 혼자서 애기를 데리고 친정에 와부렀지. 그런데 우리 아저씨도 빚만 늘고 생활이 안 되니까 안동에 내려왔지.

 
▲ 두 아들 규완, 규진과 함께

 

우리 동네 뒷산이 문중 산이거든.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고 거기를 개간하기 시작했지. 우리 아저씨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몰라.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가서 일하는기라. 그러다가 초롱불이 꺼지면 컴컴하니까 집에 돌아왔는데, 그게 새벽 한 시고 그랬어. 그렇게 뒷산을 일구었지. 그때는 개간할 때 우리 애를 포대기에 싸서 밭에 데리고 갔어. 그때만 해도 봉화 재산에서 호랑이가 애기를 물어갔다는 소문이 들릴 때였거든. 근데 내 친구가 봉화로 시집을 갔는데, 진짜 눈앞에서 호랑이가 이웃집 애를 물어가는 걸 보고 식겁을 했대. 그래서 친정으로 다시 왔어. 그때는 우리 동네도 늑대 같은 짐승들이 잘 내려왔어. 그런데 애를 포대기에 싸서 밭에 데리고 가서 겁도 없이 일했다니께. 사실 내가 몸이 너무 약해서 거의 일을 못 했거든. 그래서 이웃에서 내가 농사일도 안 한다고 뒤에서 욕을 많이 했어. 그래도 우리 주인은 늘 나를 감싸주었지.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어.

 

 

님이 가신 뒤

 

 

오늘은

이렇게 느꼈습니다

나뭇가지 끝마다

맺힌 아름다운 쪼그만

수정 구슬을 보아도

내게는 서럽게만

느껴집니다

하얀 가지의 노래마저도

서럽게만 느껴집니다

지상의 가지가지

모든 것들이

예전에 몰랐던 서러움으로 가득 찹니다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 남편의 은사님과 함께
 

죽을 고비 앞에서 일기를 쓰다

 

내가 농사일은 잘 못 했지만, 새마을운동은 열심히 했어. 서울에서 내려오니까 농촌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꼬. 그래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어.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나 봐. 지금은 목소리가 이렇지만, 그때는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는 목소리였어요. 일직면 새마을 부녀회장으로 일을 참 많이 했지. 연탄을 팔아서 부녀회 기금까지 마련하면서 앞장섰지. 그래서 청와대 가서 훈장까지 받았어요.

 

▲ 새마을운동 야유회. 오른쪽에 검은 양장차림
▲ 새마을부녀회장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할머니.
 

열심히 살다 보니까 그래도 밥술이라도 뜨게 되더라고. 그런데 막내(규영)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내가 많이 아프기 시작했어.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어. 계속 어지럽고, 길을 가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르더라고. 그래서 별 방도가 없으니까 기도원에 들어가게 됐어. 무언가 의지할 것이 필요했지. 기도를 하니까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도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삶이 허무해지는기라. 그래서 내 삶의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게 막내딸 초등학교 4학년 때였지.

 

 

안녕, 내 사랑

 

살림이 조금 좋아지니까 우리 주인이 비닐하우스를 세워서 고추 농사를 지었어. 안동에서 제일 처음으로. 그래서 우리 주인이 영농우수상도 타고 그랬지. 멜론도 하우스에서 재배했는데, 연탄불을 피워서 멜론을 키웠어. 그렇게 살림이 좋아지니까 우리 주인이 포크레인을 사면서, 이제 자네 고생 안 시킬께 그러더라꼬. 안동에 골프장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제일 비싼 포크레인을 샀지. 그래서 완전히 거지가 돼 부렀지. 그것 때문에 우리 주인이 나락() 장사한다고, 나락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쳤는데…… 수술 받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 그게 1998년이지. 우리 주인이 쉰여섯 살 때. 혼자서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해야 했지. 내가 쓰레기 매립장 공사장에도 나가서 일했어.

 

 

매립장의 하루

 

 

까마귀 때 우글거리는

기분 나쁘게 우는 곳

쓴 무더기가 왜 저렇게 많을까

사람들은 단 것을 다 먹고

쓴 것만 토해 내는가

벌 떼, 파리 떼는 너무 많이

우글거려, 단맛을 찾으니

징그럽기 그지없다

 

더러움 무더기의

무질서 위에

유리 못 찔릴까

두려움 안고

엄마들의 기적의 가슴을

연출하는 삶을 엿보며

넘어가는 석양 언덕에 서니

인간의 긍지에 가슴이 저리다.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 젊은 시절
 

등 떠민 아들의 미국행

 

1998년 그해 2월에 우리 아저씨가 세상 떠나고, 8월에 둘째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 원래 우리 주인이 아이들한테 너희들은 우리처럼 고생하지 말고, 큰 나라에 가서 잘살아보라고 했거든. 그래서 장례식 치르고 집에 있는 걸 다 터니까 1,600만 원이 나오더라고. 그걸 쥐어서 보냈지. 애가 공항에 가서 안 간다고 하면서 막 울더라고. 그래서 더 나은 세상에 가서 공부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등을 떠밀었지.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까 돈이 뚝 떨어졌대. 돈을 벌면서 공부를 계속 하려고 해도 학비도 안 되더래요.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고, 청소일을 시작했대. 그렇게 엄청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자리를 잡았지. 그래서 형도 데리고 가고. 형은 미국에 늦게 갔는데도 빨리 성공했지. 동생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 지금은 아들들이 엄마가 참 그때 잘 보내셨다고 해. 그런데 내가 처음 미국에 나갔을 때는 정말 펑펑 울었어요.

 

▲ 어느 해 눈 오던 날
 

환갑 때쯤 미국 있는 아들한테 갈라고 비자를 낼라 하니 돈이 있나? 주인이 빚만 2천만 원 남겨 놓고 가서 그 빚을 갚는다고 10년이나 걸렸어. 노동판에 나가서 품 팔아서 빚을 갚고 있을 때였는데, 그래도 무리를 해서 아들을 보러 갔어. 둘째를 8년 만에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때까지 진짜 눈물로 세월을 보냈으니까. 통화도 하기 어렵잖아. 미국 가서 만나기 전만 해도, 아들이 미국서 부자 돼서 잘 사는 줄 알았어. 근데 가보니까 흑인 빈민촌에,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같은 데 사는 기라. 방도 없이 거실에 매트리스 하나 깔고 전기장판 켜고 살더라고. 내가 진짜 깜짝 놀랬어. 막 눈물이 쏟아지는데 펑펑 울었어. 그래서 내가 아들한테 집에 가자고 그랬어. 그래도 한국 가서 살면 이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했지. 그런데 아들도 울면서, 이제껏 고생했는데 이렇게는 못 간다 하더라꼬. 그때 미국서 5개월 있다가 왔어. 곁에 한국 아가씨(며느리)가 들어가서 같이 살고 있더라꼬. 며느리가 참 고맙고 착해.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나는 며느리한테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고 10만 원짜리 속옷을 사서 입고 갔어요. 그런데 며느리는 10달러에 5개짜리 속옷을 사서 입고 지내더라고. 그래서 할매도 아닌 젊은 네가 왜 이런걸 입노 했더니, 자기가 미국에 멋 내러 왔느냐고 하더라고. 아이들 훌륭하게 키우려고 미국에 온 거지, 자기들 호강하러 온 게 아니라고 하잖아. 내가 그 말 듣고 깜짝 놀랬지. 딸만 둘인데 공부를 참 잘해. 애들이 1학년 때부터 내내 일등이래.

 

▲ 할머니의 책장 ⓒ정형민
▲ 1984년 일기장. 막내 규영 씨가 선물했던 카네이션 ⓒ정형민
 

 

버려진 매트리스

 

 

깽하게 달린 하늘

가을 아파트 앞

외로워 떠는 듯도 해 보이는

버려진 매트리스

아직은 유년이구나

 

뗏목처럼 둥둥 떠오는 생각

알라바바 댄디 마을 표정

찬물사발에 간장만 타서

누렇게 부황 뜬 얼굴 비친 물

마실 때가 언제였던가?

참한 솔 껍질 벗겨 울리던

떪은 송구죽

 

미국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

애배처럼 말고 부유한 나라에 잘살아 보거라

애비 뜻에 따라 주립대 들어간 아들

학비로 중단하고

궁궐 같은 르네상스 호텔 근무하나

흑인촌 싸구려 집을 빌려

청설모가 밤새도록 푸른 달빛을 넘나들며

건반처럼 두드려대는 천장

매트리스 두 개 휠터 한 개

그것도 쓰레기장에서 구한 것이라고 하는 아들

 

! 가난!

이 지구상 어디를 가도 가난이 있구나

버럭 무릎이 휘청거렸다

학부 나온 며느리에게

하도 면목이 없어

어떻게 이렇게 사느냐

화장기 없는 입술

괜스레 어머니 속을 끓게 하네요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 "죽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냈으면 싶었어" ⓒ정형민
 

시골 할매가 시를 배웠지

 

서울 딸네 집에서 8년쯤 지내다가 작년 11월에 내려왔어요. 내가 외손주를 돌봐주었어. 이제 4학년인데, 손주랑 떨어지니까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처음에 서울 올라가서, 손주만 보면서 집에 있으니까 심심하잖아. 그래서 책이라도 보려고 도서관에 갔어요. 그런데 도서관 직원이 내가 시골에 살아서 책을 못 빌려주니까, 딸을 데리고 오라 하더라고. 그래서 딸을 데리고 갔더마 책을 빌려주는기라. 거기서 딸이 내 자랑을 했지. 우리 엄마는요, 시골에 살아도 톨스토이도 읽고, 까뮈 전집도 읽는다꼬. 나는 평생 책 한 권도 못 사봤어. 형편이 안 되니까. 그래서 쓰레기장에 버려진 걸 주워서 집에 가져오고. 공공근로 같은 일 하면서 책을 많이 주웠어.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소울앤북, 2018 ⓒ정형민
 

그때 딸애 얘기를 듣고, 도서관 직원이 시를 배울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라꼬. 그래서 시창작반에 들어가서 유종인 시인한테 시를 배웠지. 그리고서 죽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내야겠다는 생각에 두 아들한테 돈을 3백만 원씩 받았어. 처음에 111편을 유 시인께 들고 갔더니, 너무 많다고 60편으로 잘라버리더라꼬. 그리고 출판사를 소개받아서 시집을 냈는데, 몇 년 지나고 내 시집이 우수도서로 선정됐다고 천만 원을 지원해 주는기라. 그래서 출판사에서 나한테 백만 원을 주고, 나머지 돈으로 또 시집을 인쇄했지.

 

거친 풍파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나

 

권영숙 할머니를 마주한 감회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폭풍우 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야생화를 본 것 같기도 하고, 거친 풍랑이 치는 바다로 거침없이 배를 몰고 나가는 강인한 어부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일직면 광연리 마을에는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꿈을 놓지 않고 작가의 길에 들어선 할머니가 산다. 꽤 많은 얘기를 나누고, 거친 손으로 쓴 시와 일기들을 읽어본 지금, 나는 권영숙 할머니를 '권영숙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 "잘 가시우" ⓒ정형민
 

권영숙 시인의 시집 참 재밌다 그지를 필독하기를 권한다. 시집을 읽는 내내, 어느 유명한 시인의 시집을 읽는 것처럼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시를 배우기 전에 일기장에 써놓은 시들도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 야생의 생명력을 물씬 풍기며 마음을 울린다. 일기를 담은 수필집도 출간될 예정이라니 몹시 기다려진다. 출판사에서 일기장을 많이 챙겨 갔는데도, 집에는 아직도 일기장이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일기장을 펼쳐들었는데 가슴이 하염없이 먹먹해진다. 눈물을 훔치며 할머니의 일기 두 편으로 글을 맺는다. (/정형민 makalu21@naver.com)

 

▲ 오래된 일기 中 ⓒ정형민
▲ 오래된 일기 中 ⓒ정형민

 

 

 

- 안동시기획연재

안동인터넷뉴스(ksg30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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